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전쟁 발발 (문단 편집) == 개요 == 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을 굳이 끼워 맞추자면 [[국공내전]]에서의 공산군 승리와 [[애치슨 라인]] 설정이라고 보면 된다. 다만 스탈린은 김일성의 전쟁 일으키자는 요청을 71번이나 기각시켰다. 몇몇은 애치슨 라인을 알게 된 스탈린이 미국이 개입하기 전에 한국을 공산화시키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결국 김일성의 남침을 허락하는 상황으로 끼워맞춘다. 그러나 이미 과거 소련의 비밀 문서가 공개된 후 애치슨 라인의 설정이 6.25 전쟁 발발에 끼친 영향이 미미한 것이 밝혀진 시점에서 애치슨 라인 가설은 모두 유보되고 있는 실정이다.[* 애초에 애치슨 라인이 생기기도 전부터 [[김일성]]은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세부적인 부분에는 논란이 있으며 이 기간 동안의 문제는 이데올로기 또는 남북한 양쪽 정부의 기원 내지는 본질 문제와 결합되어 대부분이 매우 불명확하다. 얼마 전까지 이러한 미묘한 부분은 연구자들이 일부러 회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군사 정부 시절에는 민간 학자가 북한의 선제공격을 입증하려는 목적으로 자료 수집을 시도해도 자칫 잘못하면 보안법 위반으로 고초를 겪을 위험성이 컸기 때문이다. 참고로 6.25전쟁 이전에 국지전의 존재는 역사적 사실이다. 국방부 소속 연구소 편찬 '한국전쟁사'에서도 국군이 북한군의 대대적인 공세를 국지전으로 오판한 이유도 1945년 해방 이후 지속된 국지전으로 인한 것이라 평가하고 있다. 또한 국군의 초기 대응이 늦어진 점 대표적으로 당시 [[제8보병사단]]이 북한군을 좀 더 효율적으로 막지 못한 이유로 당시 8사단의 작전 지역인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파르티잔|빨치산]]과의 분쟁 때문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당연히 그 중에는 북한 특작대도 있었다. 또한 최근 정병준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38도선을 중심으로 하는 국지전은 지속되고 있었다.[* 정병준.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파주: 돌베게, 2006.] 그러나 국지전은 6.25 전쟁의 원인 중 하나일 뿐이지 국지전이 6.25 전쟁의 시발점이라고 평가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6.25 전쟁의 시작이 북한의 대대적인 기습 남침이라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참고로 이건 미국의 주장이 아닌 '''소련'''의 주장이다.(KGB문서 공개) 엄밀하게 군사적인 개념으로만 보자면 북한 정권과 그 후원자인 중국은 제대로 한 셈이었다. 당시 한국은 미국에게 우선적인 핵심 국가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북한 정권과 중국이 간과한 게 있었다. 만약 미국이 우방인 남한의 편에 서지 않으면 전 세계 다른 국가들의 신망도 잃을 수 있다는 점을 미국이 주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냉전의 정점에서 혹시라도 미국의 동맹들이 양다리를 걸치거나 공산 진영으로 갈아타기라도 하면 미국의 세계 전략은 심각한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미국의 전략은 동아시아와 동유럽을 동일 선상에서 다룬다. 예컨대 폴란드, 발트 해 국가들, 일본 그리고 필리핀 등은 러시아와 중국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데 있어 미국이 자신들 뒤에 버티고 있음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